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모나리자>는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가장 위대한 회화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모나리자가 그토록 주목받고 화제가 되는 이유가 문득 궁금해집니다. 과연 회화로서의 작품성 때문인지, 아니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인물이 그린 작품이기 때문인지...
<Mona Lisa>
1503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미 회화에 싫증이 난 상태여서 귀족이나 부호들의 초상화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모나리자를 그린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모나리자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호기심이 시작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전에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초상화를 그린 바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초상화로 손꼽히는 <Lady with an Ermine>은 다빈치가 밀라노에 머물던 시절 대공이었던 '루드비코 스포르차'의 애첩을 그린 그림입니다. 여인이 손에 안고 있는 담비는 대공이었던 스포르차를 상징하는 마스코트였다고 합니다.
오히려 모나리자는 '누군지 궁금하지? 맞혀볼테면 맞혀봐~'라는 느낌을 주는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기록하는 걸 좋아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긴 6,0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노트 어디에도 그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의도적으로 그녀의 신원을 숨기려 했던 것이리라는 추측을 낳고 있습니다.
초상화였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완성한 후에도 죽을 때까지 본인이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 행동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혹 자신이 평생 그림으로 그려놓고 간직하고 싶은 사람을 그렸던 것은 아니었을런지...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죽은 후 그의 제자였던 Salai에게 인계됩니다. 이후, 1530년 프랑스 왕실의 소장품으로 입궁하게 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말년에 그를 끔찍히도 존경했던 프랑스 왕 '프란시스'는 모나리자를 특별히 좋아하여 그의 목욕탕 벽에 걸어두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때, 목욕탕 증기의 영향을 받은 모나리자는 표면에 균열이 생겼다고 하니... 프란시스 왕의 애정이 참 야속할 지경입니다.
그 후, 1789년 프랑스 혁명 때까지 약 260여년 간을 프랑스 왕실에 있던 모나리자.
루이 16세와 '빵이 없으면 케익을 드삼~'이라고 개념을 떠나보낸 발언으로 분노를 샀던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가 처형을 당하고, 루브르 궁전이 박물관으로 바뀌면서 최초로 시민들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모나리자는 다시 황제의 소장품이 되죠.
나폴레옹 역시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크게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를 침공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겨 놓은 노트 등을 찾아왔다고 하니, 그가 모나리자를 얼마나 아꼈을지는 짐작하고 남을 만 합니다. 그러다가 다시나폴레옹이 실각하고 나서,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그토록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회화가 잘 보존되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어쨌든 이후 약 100년여 동안 잘 보관되었던 모나리자는 1911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돌연 사라집니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회화 작품이 도난을 당한 일대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훔친 모나리자를 비싼 값에 되팔려던 이탈리아인 도둑은 결국 덜미가 잡히게 되지만, 이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고국인 이탈리아에 가있던 모나리자는 정치적 이슈가 되버립니다.
이탈리아 인들은 이탈리아 사람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 <모나리자>가 왜 굳이 프랑스로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나 봅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요구에 결국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으로 돌아오게 되고, 오늘날은 개인 경호원과 공기 정화 시스템, 3중 방탄 유리로 보호된 콘크리트 박스 속에서 안전하게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모나리자는 과연 누구를 그린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도 많은 추측이 난무했었지만, 수세기가 흐른 후 밀라노의 정부기록보관소에서 모나리자와 관련된 기록이 발견되면서 일단락됩니다.
바로 1525년 살해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제자 Salai의 재산 목록에 'La Giaconda'라는 이름의 그림이 있고, 'Lisa del Gioconda는 모나리자다'라고 분명히 밝힌 기록을 찾은 것입니다. 이로써 수세기 동안 호기심을 자아냈던 모나리자에 관한 의문 한 가지가 해소됩니다.
그럼에도 아직 많은 궁금증들이 남아있습니다.
Lisa del Gioconda는 결혼한 여성이었는데, 왜 결혼 반지는 끼고 있지 않은지... 정숙해 보이지 않게 머리를 풀어헤친 이유는 무언지... 장신구를 착용하는 게 일반적이던 시절 왜 장신구 하나 없는지... 손짓이나 손가락 하나에도 세심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배경에 넣은 그림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모나리자의 저 신비한 미소를 그려넣은 이유는 무엇인지...
어느 날, 그림을 더이상 그리지 않기로 결심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한 여인이 찾아왔다. 다빈치는 순간 그녀의 모습에서 어렸을 적 기억 속 어머니의 인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다시 그림에 대한 열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초상화를 그리자.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영원히 간직하자... 어렸을 적, 밖에서 놀다 들어와 어머니를 불렀을 때, 돌아보고 인자하게 미소지어 주시던 그 모습을...
모나리자는 이처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삶과 깊이 연관되어 많은 호기심을 야기하고 관심의 집중이 되어 왔지만, 단지 그런 관심만이 <모나리자>를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원래 모나리자를 그리던 시절만 해도, 초상화는 통상 옆모습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파격적으로 비스듬한 자세로 쳐다보는 형태(일명 '콘트라포스트 자세')의 초상화를 그렸던 것입니다. 이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르네상스를 빛낸 당대 유명 화가들이 이런 구도를 따라했다고 하니, 얼핏보면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갈법한 구도 하나에서도 다빈치의 천재성과 도전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모나리자인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도 어렸을 때 사람 얼굴을 그릴 때는 주로 옆모습을 그리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코가 삐죽 올라와 있는 모습을 앞모습으로 표현하는 것보단 옆에서 본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더 쉬웠으니까요.
어쩌면 다빈치의 초상화 작품을 처음 본 사람들은 크게 놀라워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정면에서 그려도 코가 올라온 것처럼 느끼게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경험했을 테니까요~
만약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었다면, 아직도 우리는 '초상화는 옆모습을 그리는 거야'라고 당연시하며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그림이 창조되던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던 우리 모든 국민들은, 그림의 탄생을 가져다 준 높은 이상의 수호자이자, 상속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그림이 뛰어난 예술적인 상상력과 솜씨로써의 업적일 뿐만아니라, 그것의 창조자가 우리 문명의 중심적인 의미를 표현하였기 때문입니다. - JOHN F. KENNEDY, 1962년 미국 순회 전시회에서
모나리자는 그 태어나던 시기에 누렸을 회화 작품으로서의 우수성 뿐 아니라 이후 500년간 후세가 가졌던 관심과 호기심, 작가의 삶에 대한 인류의 경외심 등이 녹아들면서 그 가치가 더욱 새로워지며 작품의 의미가 더해진, 그리고 계속 더해지고 있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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