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라는 테마는 해당 분야에 조예가 어느 정도 있는 일부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문화라는 생각을 다소 갖고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을 보니 미술이란 분야가 그렇게 어렵게 느낄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 방송의 기획 의도가 "미술"이란 분야를 즐기는 사람만 향유할 수 있는 괴리된 문화예술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가까이 즐길 수 있는 예술이라는 점을 알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의도였다면 정말 잘 만들어진 프로그램인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총 5부작으로 구성된 다큐멘터리의 첫 편은 "모나리자의 진실" 이라는 부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역시나 세계 최고의 회화 작품,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손꼽히는 "모나리자(Mona Lisa)"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2006년 한 해 동안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는 820만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고 합니다. 약 40만 점이나 되는 미술품들을 소장한 세계 최대의 박물관 루브르에서도,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모나리자라고 하네요.
모나리자가 왜 그토록 유명하고, 왜 그토록 중요한 예술 작품인지 궁금해집니다.
도널드 새순(Donald Sassoon, 런던대 비교역사학 교수)
모든 여성의 초상화들 중에서 왜 모나리자가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이 재현되고 있는가? 모나리자를 둘러싼 다른 역사적인 질문과 마찬가지로 간단한 해답은 없다
그리 간단한 해답은 없다고 하지만, "명성이 명성을 낳아 세계 최고의 명품이 된 모나리자" 라는 나래이션에서 슬쩍 답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나리자에 대한 기록은 1550년대에 쓰여진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1511~1574)의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전기"라는 책자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기록에 보면 바사리는 '모나리자의 눈썹'에 대해서도 아름답다는 내용으로 기록을 남겼다는데요, 그러나 아시는 것처럼 모나리자는 눈썹이 없습니다. (어렸을 적엔 그것을 참 궁금해했던 기억이 나네요~. 왜 눈썹이 없을까? 실제 인물이 눈썹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미처 다 못그린 것일까...?)
이 때문에 바사리의 기록이 신빙성을 잃으면서 "모나리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오게 되었고, 그 중에는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 자신'이라는 주장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사리가 비록 눈썹에 대한 잘못된 기록을 했다고 해도 여러 가지 정황상 증거를 보면 그의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고 합니다.
도널드 새순(Donald Sassoon, 런던대 비교역사학 교수)
그녀가 리자 게라르디니가 아니라 귀족 계급의 다른 부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여성에 대한 증거는 더욱 적다. 따라서 나는 모델이 리자 게라르디니라는 주장을 더 선호한다. 사실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릴 당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피렌체에 있었고 그녀 역시 그곳에 있었다는 당대의 자료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바사리의 기록을 보면, 1503년경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리자 부인이 만났다고 합니다. 피렌체는 가장 먼저 르네상스(Renaissance)를 꽃피운 지역으로 알려져 있죠.
원래 피렌체 부근이었던 빈치(Vinci)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8년간 밀라노의 루드비코 스포르차 대공 밑에서 생활을 하다가 밀라노가 프랑스의 침공을 받자 피렌체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부분들이 미스터리로 남아있다가 2005년 1월 피렌체의 한 수도원에서 모나리자가 그려진 작업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수 백년동안 궁금해하던 호기심을 한꺼풀 벗겨낼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은 셈이니 대단한 발견이었을 듯 싶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작업실의 일부는 현재 군시설이라서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데요, 모나리자 발굴 책임자인 '마네스칼키' 박사의 말에 따르면 이 곳에 남겨진 벽화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증거들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서명처럼 남긴 특유의 새 그림이라던지, 수태고지라는 작품에서 그려진 천사와 비슷한 형태의 그림 흔적 같은 것들은 이 곳 벽화가 다 빈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하네요.
수태고지 | Annunciation by Leonardo da Vinci | Date: circa 1473-1475
Technique: Oil on panel | Dimensions: 38.75 × 85.5" (98.4 × 217 cm) | Location: Uffizi, Florence
Technique: Oil on panel | Dimensions: 38.75 × 85.5" (98.4 × 217 cm) | Location: Uffizi, Florence
새 그림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서명처럼 사용된다는 사실이 조금 의아할 수 있는데요, 원래 당시까지만 해도 새의 역동적인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행'에 관심이 많았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새가 비행하는 모습을 세밀하게 관찰했고, 그는 많은 작품에 새가 비행하는 역동적인 모습들을 남겼다고 합니다.
밀라노에서 피렌체로 돌아와 머물던 당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암굴의 성모", "최후의 만찬" 등과 같은 작품으로 이미 명성이 널리 아려져 있었던 시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일개(?) 상인의 아내인 '리자 부인'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것은 많은 의구심을 자아냅니다.
암굴의 성모 | 1483 ~ 1486
최후의 만찬 | 1495 ~ 1497
피렌체의 시대 상황과 역사를 보면, 어느 정도 '모나리자'가 그려질 수 있었던 배경을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피렌체에는 1294년에 착공해 1436년, 무려 15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건축된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Santa Maria del Fiore)'라는 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은 완공 당시 유럽 최대 규모의 건축물이었다고 합니다.
르네상스를 꽃피우기 이전 이미 그런 대규모 건축물을 지을 만큼 부유했던 피렌체는 15세기 경엔 '유럽의 월스트리트' 로서의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이런 금전적인 뒷받침을 바탕으로 예술의 발전이 있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특히, 오르산미켈레(Or San Michele) 성당은 15세기 초 피렌체 상인들의 예술 후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 성당 외벽에는 14개의 수호성인 상이 있는데, 모두 모직물산 조합, 병기공 조합, 은행가 조합 등 상인조합이 후원해 만들어진 청동상이라고 합니다. 또 이 성당의 세례당 청동문의 경우 경쟁 입찰 방식으로 조각가를 뽑았는데, 1401년 당시 23살이던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가 우승해 청동문을 조각했다고 합니다.
피렌체의 전성기 시절 새로이 등장한 상인 귀족 중에서는 '메디치 가문'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은행을 물려받은 뒤 적극적으로 예술을 후원한 인물로 르네상스의 아버지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그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는 정치적으로도 예술 후원을 잘 이용한 인물이었다고 하네요.
이 로렌초의 소개로 밀라노의 공작 루드비코 스포르차의 후원을 받게 된 예술가가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입니다. 이후 장장 18년 동안 건축가, 궁정 화가, 군사 전문가로 활약하면서 '최후의 만찬', '암굴의 성모'와 같은 유명한 회화 작품을 남기는데, 이는 바로 스포르차의 열렬한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499년 밀라노가 프랑스의 침공을 받자, 다 빈치는 만토바와 베네치아를 거쳐 다시 피렌체로 돌아옵니다. 당시 피렌체는 미술품을 불태우며 ㅈㄹ발광을 하던 금욕주의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처형되면서 도시의 영광을 재현할 대형 벽화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피렌체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에게 피렌체의 역사적인 전투를 그리게 할 계획이었고 1504년 두 사람은 각각 밑그림을 그리지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새로운 안료 사용에 실패하고, 미켈란젤로도 교황의 부름을 받고 떠나면서 이 프로젝트는 무산됐다고 합니다. 여담이지만 만약, 이 두 위대한 화가가 합작으로 작품을 그려냈다면 정말 역사적인 예술품으로 길이길이 남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황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떠나기 전 미켈란젤로는 예술품 하나를 남기고 갔다고 합니다. 바로 '다비드 상(David)'입니다. 다비드 상 또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위대한 예술품 중 하나로 꼽히고 있죠.
비슷한 시기에 다 빈치는 신흥상인, 즉 '부르주아'라는 계급으로부터 초상화를 주문받습니다. 당시만 해도 교황이나 추기경, 권력가들이나 주문하던 초상화를 새로운 상인 계층으로부터 주문받았던 것입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당시로서는 새로운 사회의 변화를 상징할만한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모나리자의 주인공인 리자 게라르디니, 또는 그의 남편의 가문이 어떠했는지 살펴보게 되는데요, 우선 모나리자의 남편은 바르톨로메오의 자식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라고 합니다.
델 조콘도는 실크 사업을 통해 꽤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메디치가와 같은 유력 가문에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하네요.
그런 가문에서 어떻게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거장에게 그림을 주문할 수 있었는지는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2005년 10월, 프랑스 국립미술복원연구소에서 실시한 모나리자에 대한 정밀 검사에서 특이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원래 이 검사는 X-ray 투시를 통해 그림이 그려진 기법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모나리자의 의복 아래에 그려진 속옷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재밌는 것은 이 속옷이 출산을 앞두거나 막 출산을 한 여인들이 입던 속옷이라네요. 이를 두고 어쩌면 모나리자는 임신한 아내를 위한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특별 선물이었을 수도 있다고 해석합니다.
모나리자의 주인공인 리자 게라르디니는 1479년생이라고 합니다.(저도다 딱 500살이 많으시네요...) 원래 게라르디니 가문도 피렌체에서 꽤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데, 1300년대 유명한 정쟁에 휘말리면서 시에나와 피렌체를 잇는 경계지역인 치안티 지역으로 쫓겨났다고 합니다.
현재까지도 남아 게스트하우스로 사용되는 '비냐맛조' 빌라를 통해 게라르디니 가문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요, 비록 몰락했지만 유서깊은 가문이었기 때문에 상인 계급이었던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는 리자 게라르디니를 아내로 맞이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 밖에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 또는 게라르디니 가문 사이에는 크고 작은 연결 고리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개인적인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다 빈치에게 초상화를 의뢰했을 거라고 보는 것이죠.
더 관심을 끄는 것은 당시 만투바 공국의 공작 부인이었던 '이사벨라 데스테'로부터 끈질기게 초상화 주문을 받았지만, 다 빈치는 그녀에게 스케치만 한 장 건네고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바로 이런 공작 부인 대신 선택한 여자가 바로 모나리자였던 것입니다.
마틴 켐프(Martin Kemp, 옥스퍼드대 미술사학과 교수)
그는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모나리자는 동시대 작품들에 비해 정말 놀라운 작품이다. 모나리자는 그림을 보는 사람을 바라보고 웃고 있기 때문에 초상화와 관객의 상호작용이 여타 그림들과는 아주 다른 모나리자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훌륭한 초상화들은 모두 그림과 관객 사이에 직접적인 감정의 교류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레오나르도가 최초로 발명한 것이다.
도널드 새순(Donald Sassoon, 런던대 비교역사학 교수)
레오나르도는 '스푸마토'라는 테크닉을 가지고 있었다. 즉, 입가와 눈매를 약간 흐릿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입가와 눈매가 조금이라도 올라간 것인지 내려간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그녀가 미소를 지고 있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이다.
모나리자는 매우 혁명적인 그림이다. '스푸마토' 기법과 '콘트라포스트' 자세는 모나리자를 특별하게 하는 두 가지 핵심적인 요소다. 그것은 단순히 나의 취향이 아니라 라파엘로 같은 사람이나 이후 200년간 유렵의 화가들이 모나리자를 보고 그 포즈를 모방했다는 사실로 충분히 증명된다.
모나리자는 인물도 인물이지만, 그 배경도 역시 중요한 요소라고 하는데요, 이는 인간의 몸과 지구 사이의 커다란 유사성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림은 현재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습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이탈리아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모나리자가 프랑스에 걸려 있는 까닭에 대해서도 소개합니다.
1516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향했습니다. 바로 당시 20살을 갓넘긴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초대로 인한 것이었죠. 왕은 자신이 어릴 때 살던 '클로 뤼세(Clos Luce)' 성을 다 빈치에게 내줄 정도로 극진한 대접을 했다고 합니다.
프랑수아 생 브리(클로 뤼세 박물관장)
프랑수아 1세는 문학과 예술, 문화를 사랑했다. 그는 이탈리아에 매혹되어서 좋아하는 사람을 프랑스로 초대할 수 있었다. 당시 프랑수아 1세는 20세의 젊은 왕이었고 레오나르도는 63세였다. 그들의 관계는 프랑수아 1세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나의 아버지'라고 여길 수 있을 만큼 왕은 그에 대한 끊임없는 존경과 한없는 찬사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이 때 다빈치는 프랑스로 가면서 몇몇 회화 작품을 가지고 갔는데, 그 중 모나리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모나리자를 리자의 가족에게 넘기지 않은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미완성이었기 때문이었을지, 아니면 무슨 내막이 있는 것이었는지...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만났지만 안타깝게도 4년 만인 1519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다 빈치의 유언에 따라 고국인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 땅에 묻혔다고 합니다.
다 빈치가 죽자 프랑수아 1세는 퐁텐블로 성을 미술관으로 꾸미고 모나리자를 비롯한 미술품들을 전시했다고 하는데요, 이 새로운 미술을 접한 프랑스 화가들은 훗날 퐁텐블로 파를 탄생시킨다고 합니다. 바로 프랑스의 르네상스 가 시작된 것이라고 하네요.
빈센트 드로케 박사(퐁텐블로 국립 박물관 학예연구원)
프랑스의 왕들은 모나리자를 획득하면서부터 가능한 한 그들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놓기 위해서 노심초사했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에 가져다 놓았다. 어떻게 보면 모나리자는 항상 왕을 따라다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상징적이라고 할 만하다.
피에트로 마라니(미술평론가)
5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모나리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모나리자의 가치와 상징은 지금도 시간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리자 게라르디니는 늙어서 죽어 사라졌지만 그녀의 초상화는 오랜 시간의 시험을 견디어 냈다. 처음에는 피렌체의 평범한 한 여성의 초상화에 불과했지만, 레오나르도가 시간을 초월하는 우주적인 성격과 가치를 지닌 예술품으로 승화시켰다.
미술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역사를 짚어보는 프로그램으로서 아주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라고 생각됩니다. 그 시작점을 모나리자로 잡았다는 점도 참 인상적입니다. ^^
- 제 1 편 "모나리자의 진실" (2007년 3월 3일)
- 제 2 편 "모던을 향한 발칙한 도발 - 마네의 올랭피아" (2007년 3월 10일)
- 제 3 편 "미술 공장의 CEO, 앤디워홀" (2007년 3월 17일)
- 제 4 편 "영국, 미술의 신화를 만들다" (2007년 3월 24일)
- 제 5 편 "블루칩 아시아" (2007년 3월 31일)